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툴룬 왕조 (문단 편집) == 내분과 [[카르마트]]의 침공 == 쿠마라와이의 후계자들은 무력한 통치자들로서 튀르크 출신, 혹은 흑인 군사 계급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재정적, 군사적 안정은 점차 약화되었다. 쿠마라와이가 896년에 다마스쿠스에서 자신의 노예에게 피살되면서 후계자 계승 문제로 내란이 일어났다. 내분 끝에 장군 무함마드 이븐 압바는 쿠마라와이의 어린 아들 '''하룬'''을 옹립하고, 섭정이 되어 이집트를 장악했고, 시리아의 장군들은 바드르 알 함마미 등과 대립했다. 한편 10세기에 들어 쉬아 계열 이스마일파(7이맘파) [[카르마트]] 세력 중 하나인 자카르위가 시리아와 이집트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인 야흐야 (사힙 앗 나카)가 902년 [[라카]]에서 투그즈 이븐 주프를 격파하고, 다마스쿠스를 포위했다. 바드르는 다마스쿠스 수비에 나선 투그즈 이븐 주프의 구원에 나서 야흐야를 전사시켰지만 승리하지는 못했고, 카르마트 반란군은 야흐야의 동생 후세인 (사힙 앗 샴마)을 지도자로 삼아 재차 시리아를 유린했다. 그 과정에서 이스마일파의 거점이었던 [[살라미야]]도 파괴되어 향후 [[파티마 왕조]]를 세우게 되는 [[압둘라 알 마흐디]]가 시리아를 떠나 [[마그레브]] 방면으로 떠나게 되었다. 카르마트의 침공에 툴룬 조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자 시리아 주민들은 아바스 조에 개입을 요청했다. 903년 7월 30일 제17대 칼리파 [[알 무크타피]]는 원정에 나서 8월 9일 친히 라카에 이르렀다. 카르마트군 지휘관 알 무타왁크는 알레포 주변에서 10,000명의 아바스군을 격파하고, 도시를 포위했는데, 살아남은 1,000명의 병력이 아불 아가르의 지휘하에 항전하여 함락되지 않았다. 아바스 조와 연대한 바드르 알 함마미는 다마스쿠스 주변에서 카르마트군을 격파했고, 아바스군의 장수 알 후세인 이븐 함단이 추격에 나섰다. 기세를 탄 아바스군은 무함마드 이븐 술레이만 알 카팁의 지휘하에 11월 29일 [[하마]] 남쪽 24km 지점에서 10,000명에 달하는 카르마트군에 맞섰다.[* 하마 전투의 배치 : 카르마트측) 좌익 - 마스루르 알 울라이미 휘하 1,500명의 기병과 예비 기병 400명, 중앙 - 다이 앗 누만 휘하 1,400명의 기병, 3,000명의 보병, 우익 - 쿨라입 알 울라이시 휘하 1,400명의 기병과 예비 기병 200명 / 아바스측) 좌익 - 알 카심 이븐 시마와 유믄 알 카딤 및 [[바누 샤이반]]과 바누 타밈 보조군, 중앙 - 무함마드 이븐 술레이만 알 카팁, 우익 - 알 후세인 이븐 함단] 알 수에니 이븐 함단의 활약으로 전투는 아바스군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다이 앗 누만 등 카르마트군 장수들이 전사했다. 지도자 후세인 이븐 자카르위는 쿠파로 도주하던 중 [[라흐바]] 인근에서 사로잡혀 라카로 압송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